우리는 인정해야만 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는 버려진 빈 깡통마냥 메마른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내리막길의 끝에 다다를 때면 모든 버려지는 것들의 종착지가 그러하듯 이별하게 될 것이었다. 길든 짧든 언젠가는 닿을 곳이었다.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인지, 더 이상 너도, 나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만 하자.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힘겹게 잡고 있던 줄 하나를 놓치는 듯한 탈력감을 느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고, 눅눅한 침 냄새가 고인 숨을 겨우 색색이는 동안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다시 숨을 내뱉고를 반복했다. 너는 그 동안에도 단 한 마디의 말이 없었다.


지긋지긋해, 이젠.


나는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앞서간 마음과 달리 더딘 몸뚱이는 그를 따라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스스로를 일으키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헉, 하고 바닥을 되짚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올라왔다. 깨진 항아리의 조각를 밟은 것을 알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순간을 더 없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결혼식은 안 갈 거야. 바라지도 마. 청첩장이라도 보내봐,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절뚝절뚝 걸으며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궁금했으나, 그것마저도 부질없는 기대만 같아 떨쳐버렸다. 그게, 사랑이라고. 나는 울며 내게 했던 너의 말들을 되짚어본다. 나를 떳떳치 못한 치부로 여기면서도 그것이 저의 보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너의 치졸한 변명은 나를 화나게 하기보다는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금세 곧 나를 더 비참한 위치로 끌어내리게 했다. 나는, 너의 사랑이고 싶었는데.


신발을 신기 전, 나는 내 발에 박힌 사기 조각을 뽑아 던졌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현관을 나섰으면 했으나 나는 또 다시 그러지 못했다. 피가 너무 흘렀고, 구두를 산 지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결국 한 짝의 구두를 들고, 벌겋게 물든 양말을 신은 채로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까맣고 바지런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벌건 핏물을 떨구며 가는 동안, 불현듯 시 하나가 생각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발간 진달래꽃, 발간…….



씨발놈.


순간 봉선화 씨가 터지듯 흘러넘치는 눈물을, 나는 참지 못했다.


개, 씨발놈…….


안녕을 말하는 순간, 나는 홀로 꽃 뿌리며, 홀로 걸었고, 홀로 떠났다. 한철도 피지 못하고 비가 내리면 저버릴 꽃들이며, 오후면 북적거릴 거리였지만, 이제 정말 우리가 함께 걸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못내 서러워졌다. 해야 할 이별이었으며, 사랑할 가치도 없을 만큼 형편없는 너였으나, 빈 말로라도 나를 붙잡지 않은 네가 정말로, 너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노라고 못을 박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너를 한 때나마 더 없이 사랑했던 내가 한없이 비참하고 가여워져 나는 곧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



말하지만, 정말로 결혼식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가지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사귀었고, 그 탓에 너무 많은 것이 얽힌 관계였다는 것이다.


정 과장, 김 대리랑 싸웠어?

네? 아뇨, 뭐 별 일 없어요.

뭐가 아냐, 자네만 보면 거북이 목 감추듯이 숨어 다니는데. 평소엔 그렇게 사이좋더니만.

하하, 그러게요. 왜… 저럴까요, 뭐 잘못했나?


물론 하기는 했지. 진짜 개좆같은 잘못인데 말 못 하는 게 아쉽네. 웃는 입에서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영업부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을 매일 연습시켜주는 참 고마운 직장인 것이다.


김 대리 결혼 한다는 건 알아?

그럼요.

그럼 잘 좀 보여 놔. 이제 금방 임원될 건데.

…네?

이번에 결혼한다는 여자, 우리 거래처 사장 외동딸이잖아. 몰랐어?



그건 정말 몰랐네, 시발.


그렇게 사적이어야 했을 결혼식이 공적으로 참석해야만 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유일무이한 절친으로 알고 있는 어머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버텨냈는데. 고작, 회사 때문에.

그러나 나는 되도록 좌절하지 않으려 애썼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증오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회사를 당장에 때려치울 수 없듯, 내게는 삶을 이어나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싫은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사는데, 그 중 하나가 그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비즈니스, 비즈니스…….


웃으며 받은 샴페인 잔을 가볍게 흔들어 마시며 나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읊조렸다. 격식을 맞춘답시고 몸에 딱 맞춰 입은 정장에 숨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식을 보고, 회사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는 곧장 식장을 벗어날 것이었다. 그의 결혼식 사진에 제 얼굴을 남길 생각만큼은 정말, 진정 추호도 없었다. 그것만큼은 제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임원이라면 이사직이려나.


말 그대로 낙하산이네. 고공 승진이야, 아주. 그가 저를 떠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분명 어머님이 밀어붙였을 것이고, 마마보이인 그는 별 저항 없이 넙죽 받아들였겠지. 띨하긴 해도 멍청한 녀석은 아니었기에, 그녀와의 결혼이 가져다 줄 이익이 무엇인지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도 나를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라도 관계를, 이어가려고…….


아, 무슨 개소리야.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설령 그가 저를 사랑했기 때문에 했던 제안이라 할지라도 그건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사랑을 그가 했더라면, 그는 다른 선택을 했어야만 했다. 사랑이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공과 사를 가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지고 있는 패들 중에서 가장 우선시 하게 되는, 그런…….


저 멀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멋들어지게 하얀 웨딩 수트를 입은 네가 사람 좋은 얼굴로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뒤로 넘겨 올린 머리와 전에 없이 단장한 네 얼굴은 봄인 양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마치 세상에 슬픔, 걱정이라고는 하나 없이 기대만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이곳에 오며 하고자 했던 모든 다짐들을 잊어버렸다.


빈 잔을 탁자에 올려두고 나는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식장을 빠져나왔다. 참고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누군가가 가차 없이 발로 걷어 차버린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너와 처음 사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서로 손을 잡고, 키스했으며,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다. 반지도 맞췄고, 언젠가 먼 훗날, 해외로 가 결혼식을 올리자며 농을 주고받기도 했다. 오늘 날 이렇게 헤어지기까지 우리는, 십 수 년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여왔는데. 만난 지 고작 일 년도 되지 않는 여자와 평생을 약속하면서 어쩌면 그토록 세상에 더 없이 행복한 사람처럼 굴 수가 있느냔 말인가.


…만나자고 했으면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혼한 이 후에도 우리의 관계는 변하는 것이 없다며, 앞으로도 쭈욱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잖은가. 무릎까지 꿇고, 꽃다발과 케이크까지 사들고 와서 내게 구애한 주제에, 어떻게, 어떻게!


속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 어딘가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윗 단추를 잡아 뜯으며 나는 도망칠 곳을 찾았다. 혼자 있고 싶었으나, 사방팔방 사람이 없는 곳이 없었다. 로비의 중앙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결국 사춘기 소년마냥 화장실에 틀어 박혔다.


열린 창문에서 식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으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변기 뚜껑 위에 앉아 멍하니 잠근 문을 바라보았다. 식장 여기저기 얼굴을 박아둬야 할 인사들이 천지일 텐데도 차마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결혼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것만큼은, 도무지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


한심하다. 얼굴을 감싸 쥐고서 나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어느 누구에게 이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화장실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다. 또각이는 하이힐 소리와 그에 맞춰 들어오는 무거운 구두소리가 바삐 밀려들어와 쾅, 칸막이에 부닥쳤다. 그에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달캉이며 거칠게 칸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목소리가 유리벽 여기저기로 반사되며 울려 퍼졌다.


으응, 빨리…….

보채지 마, 좀.


헉, 헐덕이는 숨소리와 함께 혀를 섞는 질척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따각따각, 여자의 하이힐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바스락대며 옷가지들을 헤치는 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하필이면 들어온 것도 꼭 제 옆 칸인 탓이었다. 맙소사. 나는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식이 시작하고 나면, 분명 한산해지는 장소기는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없거니와 여기는 남자 화장실인데. 설마 여기서 떡치는 건 아니겠지?


아흐, 아, 거기, 응, 거기 좋아…, 아!


미친 거 아냐!? 여자를 가슴을 빨아대며 젖은 아래를 들쑤시는 소리들과 함께, 지나치게 큰 비음이 뒤섞였다. 말하지만 여긴 클럽도, 홍등가도 아니었다. 창밖으로 잔잔히 읊어지는 주례사와 명명백백하게 섹스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난잡한 잡음들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입을 막아야 할 지, 아니면 귀를 막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제발. 시간아. 빨리 좀 가라.


그리고 늘 그렇듯, 불행은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좆같은 일련의 상황에서도 기특하리만큼 더 최악의 상황을 찾아 내 앞에 들이밀어 주고야 만족하는 것인지, 나는 꿈보다도 더 믿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균열처럼 터져 나온 내 핸드폰 벨소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띠리리리리――――


일순 옆 칸에서 진행되던 모든 소리들이 멈췄다.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이 벨소리가 다른 어느 장소가 아닌 바로 저들의 옆 칸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벨소리가 울리기 직전, 흡사 빛의 속도마냥 빠르게 통화 종료를 눌렀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사람이 있잖아? 놀란 듯 속삭인 여자의 말은 여전히 조용하다기보단 지나치게 컸다. 그러기에 좀 체크라도 하고 들어오지 그랬어요. 씨이발.


처음 화장실에 들어왔던 때보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더한 절망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는 사이 옆 칸의 사람들이 옷가지를 챙겨 나갔다. 더 이상 제 목소리가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듯, 여자는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식장에서 들려오는 화려한 피날레 소리와 사람들의 박수소리들로 실내가 가득 메워질 때 쯤, 나는 참았던 숨을 기다랗게 내뱉을 수 있었다.


여하튼,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웨딩 촬영이 끝나고 나면 불편한 얼굴들은 거진 다 저들끼리 모여 시간을 보낼 터였다. 늦더라도 식사 자리에는 얼굴을 내밀어 놓는 편이 나았다. 한 차례 마른세수를 마치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러 문을 열었을 때였다.


하이.


…바로 마주보는 세면대에 기대 서 있는 남자가 인사했다.


헉.


덜컹! 나는 열었던 문을 그대로 다시 닫아버렸다. 분명 나간 줄만 알았는데. 여자 혼자 나간 거였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한 번 뿐이 나지 않았으니, 이후로 누군가가 들어왔을 리는 만무했다. 말하자면, 방금 본 그 남자가 바로 제 옆 칸에서 떡을 치던 그, …씨발, 진짜 도른 거 아냐? 왜 있는 건데!?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으나, 더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여지껏 저기서 기다린 것을 보면 분명 여기서 얼마나 더 뻐긴들 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결국 나는 민망하리만큼 크게 닫았던 그 문을 다시 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안녕… 하세요?


남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물론 호의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애써 모른 척 마주 웃어 보이며 남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세면대 앞에 섰다. 딛는 걸음마다 바닥에 가시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끔찍한 기분이었다.


결혼식, 오셨나 봐요.

아, 네.


오른편으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옷깃을 바로 해 단추를 여미었다. 아, 머리 삐쳤네. 넥타이도 다시 매야지.


오늘 있는 결혼식이… 딱 하나 있던데.

아, 네, 뭐…….

이 좋은 날, 화장실에는 왜 틀어 박혀 계셨을까.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스스로가 잘못한 것이라곤 하나 없었는데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마도 험악한 남자의 인상과 묘하게 책망하는 듯 가시 돋친 목소리 탓이리라. 마땅찮은 말을 찾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는 나를 남자는 재촉치 않았다.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좋은 구경 하시려고?

아니, 그… 좋은 시간 방해한 건 죄송합니다만, 장소가 부적절했다고 생각… 하는데요.


보폭이 뭐 이리 커. 순식간에 내 근처까지 다가온 남자와 최대한 닿지 않을 간격을 유지하며 물러선 등 뒤로 벽이 와 닿았다. 완전 쌩 양아치인 것 같은데. 이대로 한 대 맞는 건 아니겠지, 설마?


폰.

예?


남자는 다시 말하는 대신 거침없이 내 주머니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그 손을 적극적으로 붙잡지 못했다. 바로 코앞에서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위협하는 시선 앞에서, 지금 남자에게 괜히 까불어대 봤자 별 이득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조금 변명하자면, 남자에겐 자연스레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분위기 같은 것도 있었다.


풀어.

저기,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할부 아직 남았지?


나는 군말 없이 패턴을 풀었다. 남자가 핸드폰의 화면을 들여 보는 동안,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남자가 하는 오해가 무엇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대략적으로는 알 것만 같았으나, 이건 말 그대로 그저 우연에 불과했을 사고가 아닌가. 나는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선 큰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미 한참 시간을 넘겨버린 결혼식장에 나타날 가장 적절할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었다. 식사가 이미 다 시작하고 나서는 너무 늦었다. 적어도 그 전에, 자리가 아직 혼잡한 틈을 타 끼어들어 애초에 있었던 양 연기를 해야만 하는데…….


저, 이만 가 봐도 됩니까? 오해는 이제 다 풀리셨을 것 같은데.

뭐. 별 것 없긴 하네.


아, 살았다. 무사히 폰을 건네받고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였다.


신랑이랑 돈독한 사이었나봐.



아차.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진들을 잊고 있었다. 분명 정리를 한다고 했었는데, 핸드폰에 남은 것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온 몸의 피가 발 아래로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토록, 급작스럽게, 그것도 선우를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관계를 들키리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나는 최대한 당황치 않으려 애쓰며 웃었다.


친한 친굽니다.

그래?


남자가 앞으로 다가와 섰다.


네.


식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수히 많은 발소리 사이로, 남자가 내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가볍게 풀렸다가 다시 단단히 옥죄여오는 은근한 감각에 무심코 침을 소리 내 삼켰다.


잘 차리고 가셔야지. 친한 친구 분 결혼식인데.

그…렇네요. 이걸 깜박했네, 나도 참. 하하…….

갑시다. 너무 늦었네.


뚜벅뚜벅, 남자는 경쾌한 걸음으로 가 문을 열어 주며 고개를 까딱였다. 먼저 나가라는 듯 하는 신호에 사양치 않고 서둘러 걸음을 했다. 남자의 말마따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있다 다시 봅시다.


스치듯 남자가 그렇게 말한 것 같기도 했지만, 다시금 뒤를 돌아봤을 때, 남자는 멋모른다는 능청스런 얼굴로 꼭 처음과 같은 손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이제 됐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은 맘이라면 더욱이 없었고. 나는 그대로 곧장 식당까지 걸음을 이었다. 다행이도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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