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전화, 전화를 해야 한다고.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저 너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신호음을 듣고 있었을 뿐이다. 전화?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신호음은 길었다. 번호를 누른 기억마저 없으면서도 나는 이 끝에 누가 답할 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끊지 않았다. 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바쁜 시간이겠지. 전화가 왔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다 혹여나 그가 받는다면, 그 우연찮은 행운에 감사하며 목소리만을 담고 끊을 생각이었다. 많은 대화를 바란 것도 아니다. 딱, ‘여보세요’ 하는 그 목소리만…….
연합의 다이무스 홀든, 바꿨습니다. 용건을.
아.
우습게도. 미련하게도. 나는, 또.
…
당신은 그 때 내게 사랑한다 말해야 했었다. 아무리 다른 일이 바빳더라도, 혹은 내가 못 미더웠을지언정 그대가 내게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살기를 바란다면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고,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끝났다. 그로부터 나는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
영영 그림자로 남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스스로를 떠올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름도, 가문도, 제게 있던 어떤 사명도 모두 형체 없이 무너졌다. 이대로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된다면,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더 없는 평온이 남자를 덮쳤다. 그 어떤 유토피아가 비췄던 것도 같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를 끌어 올리는 손이 있었다.
――이글, 이글……? 눈을 떠, 이글 홀든!
헉, 소리와 함께 감긴 눈이 떠졌다. 저택은 때 아닌 침입자로 인해 아수라장이었다. 우왕좌왕 소란스러운 주위를 둘러보던 이글의 시선이 저를 끌어안은 상대에게로 향했다. 저토록 필사적인 얼굴의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꿈이래도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도 썩 나쁘진 않은데 싶어 이글은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형이야?
…그래.
하하, 말도 하네. 신기하게.
아. 맞닿은 이마가 따뜻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알 지 못했다. 그러나 닿은 순간 알 수 있었다. 가장 닿고 싶던 이 온기까지, 정말 무척이나 길었어.
형은 그새 잘생겨 진 것 같아.
실없는 소릴.
보고 싶었어, 형.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칠흑 같은 무기력감 속에서 떠오르는 아쉬움이란 단 하나뿐이 없었다. 키스. 하고 싶었는데. 분명 당신이 들으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겠지만, 그러더라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이 후, 가장 달콤한 입맞춤을 해주리란 것을. 그것이 당신의 사랑임을.
…
베개에서는 녹슨 검의 냄새가 났다. 그 죽은 쇠붙이의 흔적을 그 역시 알아차렸으리라. 다이무스는 몇 번이고 덧칠된 핏자국 위를 더듬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토혈에 안의 솜뭉치마저 엉겨 붙은 그것은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것이 마치 그가 남긴 고통의 유산만 같아 남자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증상이 반복될 때마다 그는 느꼈으리라. 무뎌지다 못해 망가져가는 몸이었다. 이제 전처럼 날을 세울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둘러도 베지 못하는 둔기가 된다는 것은 검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경박한 망나니라 하지만 너 역시도 홀든가의 검이었지. 그것을,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아니, 잊은 게 아니었다. 단지 잠시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이무스는 자신의 실책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잠깐의 꿈이었을 뿐,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우리는 괜찮다. 괜찮다……. 말이라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게 안주하길 바랐다. 어쩌면 제멋대로인 놈에게 괜찮은 족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초라한 막장은 그의 무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클라이맥스 뒤로 고작 죽음의 품에 너를 내어주기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나는 그저…….
“…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품 안에서 오롯이 사랑만으로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 과욕이었을까? 정녕 그랬던가, 이글? 남자의 손은 한참동안 핏자국 위를 서성였다. 굳은 피딱지들이 손가락 지문 위로 그려질 때쯤, 남자는 시종을 불렀다.
“치워라.”
“네?”
“깨끗이 비워 모두 태우도록.”
“하지만, 도련님……!”
“번복하지 않겠다. …물건이 많으니 내일까진 시간을 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이무스는 유유히 이글의 방을 빠져나갔다. 황망한 시종의 시선과는 별개로 남자의 말은 충실히 이행됐다. 산더미같이 쌓아올린 유품들 위로 불이 놓아졌다. 뒤늦게 안 벨져가 급히 달려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화마 앞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다이무스가 말한 이틀이 지난 후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고, 홀든가의 하늘은 오랫동안 뿌연 잿빛으로 물들었다. 불이 꺼진 것은 그로부터 나흘 째 되는 날, 지독한 소나기가 정원을 쓸어가고 나서였다. 날이 개자마자 다이무스는 이글의 방을 찾았다. 남자는 텅 빈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발걸음 하지 않았다.
몇 년 후, 홀든가의 가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불치병이란 말도 있고, 뜻밖의 사고라던가, 혹은 타살이라는 말도 나돌았지만 금세 잊혀졌다. 가문에게 있어 늙고 병약한 전(前)가주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던 탓이다.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유능하고도 젊은 새 가주의 등장을, 가문은 더할 바 없이 기쁘게 맞이했다. 아니, 할 예정이었다. 적어도 그가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했을 것이다. 회사의 부름이라는 미명 하에 다이무스는 전쟁터로 떠났고, 빈 가주의 자리는 홀든가의 차남인 벨져 홀든이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은 짧았다. 일 년을 채 넘기지도 않은 채 승전보를 울린 전사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 중 다이무스는 없었다. 생존자들의 끝의 끝, 마지막이 되어서야 홀든가의 문을 두들긴 것은 다름 아닌 남자의 사망통지서였다. 다이무스가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비보에도 벨져는 그 누구보다도 침착했다. 그는 사자에게 몇 가지 물건들을 받아들고는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왔다.
방 안에서 벨져는 받아온 물건들을 하나 둘 살펴보았다. 전쟁터에는 검과 그 자신만이 필요할 뿐이라 말하던 우직한 성정 그대로, 남자가 남긴 것은 얼마 없었다. 검과 옷가지, 그리고 답지 않은 편지 따위를 쓸어보던 벨져는 일순 지친 듯 의자위로 파묻히듯 누웠다.
사실 그는 제 형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전쟁 따위로 쉬이 죽을 남자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오래된 생각이었다. 남자가 전쟁터로 향할 때, 가주의 자리를 제게 넘길 때,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 이글 홀든이 죽었을 때부터 쭉 그런 예감이 들었었다.
“…이런 품격이 떨어지는 일을 내게 맡기다니.”
훗날 이 사례는 톡톡히 받으리라. 그것이 굳이 현세에서라는 법은 없었다. 빚은 오래 지워두는 편이 나았다. 스스로를 향한 위로인지 혹은 오만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벨져는 피로한 듯 눈을 깊게 감았다.
다음날, 일어난 그는 남자의 유품들을 하나씩 태워갔다. 태울 때마다 모든 일들은 과거의 일들이 되어갔다. 벨져는 그 모든 것들을 모른 체 하기로 했다. 남자가 죽인 저들의 아비도, 유품으로 남은 주머니 안의 잘려진 은발도, 모두… 이제 홀로 남은 그에게는 그저 모르는 것들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knock, knock.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좋았다. 그곳에는 설렘이 있었다. 어느 때나, 혹은 어느 곳에서든 그 작고 얇은 벽면 너머로 갈빛 머리카락을 들이밀어 보이며 내게 속삭일 이에 대한 상상을 했다. 블론디. 그렇게 부르며 밤하늘을 닮은 푸른 눈으로 내게 사랑을 고백할, 그대, 당신……. 눈을 감으면 입맞춤해 오는 그 온기, 사랑, 나의 릭 톰슨.
사는 동안 몇 없었던 만남이었고, 앞으로도 기약 없는 약속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날 밤 우리가 처음 마주쳤던 그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어느 때고 다시 이 문을 두드린다면 문열어줄 것이다. 날 향해 있는 당신의 눈이 언제나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아. 나는 대답을 해야지. 더 없이 달콤한 키스로.
…
당신은 못생겼어. 뚱뚱하고 예민하지. 신경질적인데다 폐쇄적이고. 괴팍한데다 요리도 못 해. 할 말은 그게 단가요? 아니, 아직 남았어. 그만해요,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안 돼, 가장 중요한 게 남았으니까. 어떤 것이든 좋아요. 더는 당신에게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돌아가요, 그리고 다신……!
…다신?
다시는 내게 오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약한 의지를 무너뜨리고 쏟아진 서글픔이여. 스스로가 주체하지 못할 감정의 하중이 아래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웅크렸다. 그대를 외면하고 시은 마음은 더없이 진실 됐으나, 내게 있는 그보다 더한 바람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대가, 와주었으면 했다. 비오는 밤이나 동이 트는 새벽, 눈이 오는 한 낮이며, 새파란 바람이 들어오는 오후 한 나절 그 어느 때라도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나 그 푸른 눈동자로 나를 불러주기를 바랐다.
블론디, 블론디!
나는 금발이 아니었다. 버석버석 메마른 밀짚 머리카락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했지만,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 불러 주는 이상 나는 늘 그렇게 환히 빛났고, 그 무엇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넘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래. 다른 이가 아닌 당신이, 나를 그리 매도하는 것을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울지마오, 블론디. 내가 너무 짓궂었지. 용서해 줘.
끌어내린 손바닥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당신이 상처 입으리라 알고 내뱉은 말이었으면서도 나는 솔직히, 분명 그대는 나를 비난하겠지만, 이것이 싫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흰 손가락의 굽은 마디 하나하나를 펴 올려 젖은 손 주름위로 입 맞출 때는 흡사 성스런 쾌락마저 맛보았다. 사내의 천박한 음심이란 그대가 입은 상처랄 지라도 내 것이라면 충만해지고 하는 질 낮은 것이었으니, 나의 블론디. 나의 진실된 마음은――― 나를 용서치 마오. 당신을 사랑해 어그러뜨리고 엉망으로 분질러 뜨려 그를 즐거워하는 나를 규탄해주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 당신은 아무것도 짊어지지 말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리하여 언젠가 이 극의 막이 내리면, 그 위에서 오롯이 불타 죽을 유일한 이가 나이게 해주오.
내가 틀렸소. 거짓말을 했어. 사실은, 그대가 순결히 내게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게 될지라도, 그럼에도 그대는 내게 이다지도 아름답소. 나의 블론디. 내 평생의 유일한 사랑.
그대의 울음소리가 그제야 색을 품은 듯 짙어졌다.
열병에 걸렸다.
계절이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하루아침에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 때마침 스며든 병마는 꼭 그만큼이나 성급하게 굴었다. 엊저녁만 해도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뺨이 뜨겁고 호흡이 걸었다. 목 언저리에 가시가 걸린 듯 묵직했다. 가래도 기침도 끓지 않았다. 그저 온 몸이 뜨거웠을 따름이었다. 두터운 이불 아래 눅눅히 절어가는 의식 속에서 이글은 지난밤을 회상했다.
결혼을 한다고 했지.
얼굴이 익숙했다. 이름난 가문의 여식이었다. 영특하고 귀품 있는 여인이라 몇 번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언제부터 만났던 거였을까. 가문끼리의 언약일지도 모르지. 그에게 이런 종류의 소식은 늘 예고가 아닌 선고처럼 내려왔으니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는 제게 단 한마디의 언질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저에게 사랑한다는 밀어 비슷한 말조차 속삭여준 적이 없었지. 가늘게 뜬 눈이 둔팍하게 끔벅였다. 이마께에서 뭉친 땀방울이 눈두덩을 치고 흘러 내렸다. 남자의 비틀린 욕망만큼이나 그 무심한 성정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의 발길도 들지 않은 방안은 춥고 냉랭했으나, 그가 연인이라 생각했을 남자의 무정함만큼이나 시리지는 못했다. 얼어붙은 계절, 홀로 달궈진 모양새가 멀쩡했을 때와 그리 다르지만은 않다고. 점점 느슨해지는 사고 끝에서 그는 멍청하게도 남자를 그리워했다.
이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왕진 온 의사 나부랭이겠지. 얌전히 진찰만 하고 사라지면 될 것을 왜 굳이 깨우는지 알 수 없었다. 좀 놔 둬. 아프단 말이야. 정말 죽겠다니까. 그러나 상대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이글 홀든.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모른 체 누워있는 것에 묵직한 한숨의 끄트머리가 머리칼을 스쳤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한편이 낡은 스프링 소리를 내며 눌렸다. 그 육중한 무게감.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그 모양새가 생생히 보였다. 괴이한 감각이었음에도 의문은 없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시선이 침대를 짚은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선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접어올린 흰 셔츠의 소매 자락에서는 누릿한 다림질 향이 났다. 그려진 듯 생생한 그을린 햇볕 냄새와, 그 위를 단정하게 옥조이는 검은 베스트, 그리고 짙푸른 스트라이프 넥타이 위로…, 위로? 일순 의식이 딱딱하게 굳어 내렸다. 말도 안 돼. 꿈인가? 잘못 봤나? 그러나 그의 당혹스러움을 모르는 남자는 태연하게도, 아니 혹은 뻔뻔하게도, 그 투박한 손을 들어 이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애태우지 마라, 이글.
맙소사. 어느 사이 허리를 숙여 가까이로 다가온 숨결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 진득한 속삭임에 이글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뜨지 않을 수야 없지. 당장에 눈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이글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형?
과연 깨어있었군.
어째서 여기 있는 건데?!
그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소리쳤다.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오늘 약혼식에 참가해야 했다. 멋들어진 백정장을 입고 있어도 모자라지 않을 판에 어째서 방금 막 퇴근한 듯한 차림새인지 이유를 묻기도 전이었다.
보고 싶어서 온 것이 당연하지 않나.
뭐?
다이무스가 이상했다. 놀라 일어난 제가 몸을 밀친 것이 못내 불만스럽다는 듯 불퉁한 얼굴로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한 편으로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선 그 자태는 어느 때와 같이 위압적이었으나 그 시선의 다정함은 생전 처음의 것이었다.
…형, 미쳤어?
뭐가 또 불만인지 모르겠군. 꽃과 케이크라도 가져와서 촌극을 벌여야 했나.
꽃과 케이크라니. 누가, 다이무스 홀든이? 누군가 듣는다면 분명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가문과 일을 제외하면 검밖에 모르는 저 사내는 한평생 그런 낯간지러운 것에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예의 부인될 사람을 소개하는 자리에서조차 겉치레라도 손 한 번 잡아주지 않은 남자였다. 애초에 그런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벼락인가? 음모? 도플갱어? 이글은 가장 현실성 있는 답안지를 찾기 시작했다. 저것이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것을 믿는 것보다 지금 당장 남자의 결혼식에 찾아가 축가를 부르는 것이 더 쉬울 법했다. 그러나 그런 이글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남자는 고압적인 자세를 풀고 이글의 옆에 자리해 앉았다.
이글.
히익! 뭐야, 놀랬…, 악!
저렇게 다정하게 저를 부르는 다이무스라니.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몸을 피했을 때였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뱀과 같은 포악한 기세로 남자가 멱살을 잡아왔다. 일순 몸이 허공으로 붕 뜰 만큼이나 거친 힘이었다. 그가 도망쳤던 거리보다도 더 많이 끌려온 몸뚱이가 퍽소리가 날만큼이나 난폭히 침대 머리에 부닥쳤다.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순간 남자의 입술이 겹쳐왔다.
형, 부르는 소리가 신음처럼 목 아래로 잠겼다. 잠깐의 틈새를 벌리고 들어온 혀는 마치 제 공간이라는 듯이 입 안을 휘젓고 들었다. 말캉한 혀가 옭아매어오고, 그 축축하고 뜨거운 점막 위를 훑는 동안 핏줄이 돋을 정도로 멱살을 움켜진 손아귀는 그의 숨통마저 죄일 듯 위협스레 떨렸다.
그는, 단연컨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입맞춤이라니, 말도 안 돼……. 가파른 호흡에 이글은 남자의 팔뚝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매달렸다. 단 한 순간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뒤섞인 타액이 젖은 마찰음과 함께 삐져나왔고, 어설프게 입천장으로 혀를 누를 때면 남자는 짐승마냥 소리를 내며 그를 밀어붙였다. 벽과 벽, 그 코너 사이에 몰려 남자의 몸뚱이에 갇힌 것과는 별개로, 지독한 소유욕으로 점칠된 키스였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진 것은 견디다 못한 이글이 그 팔뚝 위로 붉은 선을 그어 내렸을 때였다. 종이 한 장 거리의 틈을 달뜬 숨의 열기가 일렁이며 채웠다. 콜록이는 얕은 기침마다 입술이 떨렸다. 벅찼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시야가 먹먹해질 정도로 벅찬 것이 있었다. 이상하잖아, 이건. 남자는 이러지 않았다. 제가 아는, 저가 사랑한 다이무스 홀든은 이렇게…….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정수리 위로 남자가 으르렁댔다. 흉포한 감정이 피부 위를 찌를 듯이 뒤덮었다. 그러나 그와 상반되는 것은, 그를 말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코를 부빈 남자는 약간의 참을성을 감미한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뺨과 축축한 입술이 차례로 이글의 머리 위를 스쳤다.
보고 싶지 않다면, 문을 잠그라고.
이글은 그 안의 속말을 금세 잡아 낼 수 있었다. 우둔하고 주의 산만한 너라면 금방 잊을 충고였겠지. 그가 아는 남자라면 그렇게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결백하다는 태도로 오만하게 선언하리라.
너의 실수다.
오, 신이여.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었다. 스스로가 가장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던 소망의 결정체와 다름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눈을 뜨지 않아도 모든 것이 선명히 보였고, 무거운 추로 누르는 듯 무거웠던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남자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일말의 거절도 허용치 않는 치밀한 욕망과 감정으로, 벅차리만큼 끝없는 다정한 애정으로, 다이무스 홀든이, 이글, 홀든을.
아,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사실을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한기가 몰아쳤다.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냉기는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듯 그를 채워갔다. 안 돼, 이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이다. 일어나고 나면 분명 아무도 없는 그 춥고 쓸쓸한 방 안에서 홀로 누워있는 저가 있을 것이다. 그건, 그것만은 싫었다. 언젠가는 깨어야 할 꿈이라면 적어도 남자의 사랑을 받고 나서 이기를 원했다.
되지 않은가? 그래도, 되지 않던가? 자신은 충분히 고독했다. 돌아보지 않는 혈육을 사랑했고, 무미건조한 육욕뿐인 관계에도 만족해하며 이 소박한 위치에서 저답잖은 순종으로 지내왔다. 수년의 시간 속에서 남자가 그를 사랑한 것은 찰나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괜찮지 않은가. 단지 꿈일 뿐인데. 이 체온과 숨결도, 저를 향한 뜨거운 심장마저도 그저 신기루에 불과할 것인데.
죄라면 한 순간이라도 사랑받고 싶은 것이 전부인 것을.
이글?
불현듯 다정해진 부름이었다. 이글은 그제야 스스로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나운 사내가 놀라우리만큼 온순해지며 고개를 숙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굳은살 배긴 딱딱한 손이 뜨뜻한 눈가를 쓸었다. 쉬이. 달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훔쳐내는 남자가 어색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분명 익숙지 않은 사과를 내뱉을까 고민했을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다이무스는 못내 고르고 고른 말을 내뱉었다.
사랑한다.
그다운 선택이었다. 하핫, 하고 터진 웃음의 끝이 녹진하게 잠겼다. 무릎이 찼다. 다시 울고만 싶었다. 그래서 남자의 두 팔이 그의 얼굴을 끌어안아 제 품에 가두었을 때, 이글은 저도 모르는 힘에 이끌리듯 눈을 감고 말았다. 한평생 약한 것을 품어본 적이 없었었을 남자의 두 손이 살갑게 그를 다독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드러난 목덜미와 어깻죽지, 그리고 서늘한 등허리까지, 마치 저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이를 다루듯 상냥한 손길이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엉망이군.
그래. 나는 당신이 이렇게 망가지기를 원했었다. 스스로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사랑해주기를.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신기하게도 뺨에 맞닿은 심장 박동은 뜨거워만 졌다. 두근. 두근. 그리고 그 맥박 하나하나의 소리는 마치 그를 위로하듯 오래토록 끊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도록.
…
있잖아, 형. 나 집을 나갈 거야.
…
겨울이 끝났다. 나는 더 이상 깊이 잠들지 못했다. 드문드문 발작처럼 눈을 뜨고 나면 길어야 몇 십 분이 지나있는 시계가 무심히 나를 맞이하곤 했다. 자야만, 하는데. 뇌리에 박힌 한마디가 유령처럼 귓가에서 나돌았다.
만나러가마. 그곳이 어디든, 네가 있는 곳이라면.
거짓말. 당신은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안다. 왜냐하면, 그대가 있는 세상에 내가 살아 숨 쉬는 자리는 없으니까. 그러나, 떠나지 않는 그 말은, 마치 당신이 꼭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 뿐만으로도 충분했다.
며칠 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혹여나 고대하던 만남이 짧을까, 나는 필요 없는 수면제를 사들여 모았다. 거리에 쌓였던 눈들은 그 사이 모두 녹아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창밖의 나무에 이름 모를 꽃봉오리가 움터났다. 푸릇푸릇한 새잎 사이로 고개 내민 그것을 바라보다 자리에 누웠다. 이 봄이 더 짙어지기 전에 당신과의 만남을 서두르고 싶었다. 부슬부슬한 이불보 위로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의식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글. 이글 홀든.
응, 형.
나는 꿈결에 대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형. 지금 금방 갈 테니까. 응, 그래. 당신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이제, 곧―――――
덜컥.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꿀내음 섞인 단바람이 커튼을 펄럭이며 밀려들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창밖엔 하얀 복사꽃이 쏟아진 알약마냥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었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